소개

반갑습니다. 이한우입니다.

걸어온 길

1961년 부산 송도해수욕장 근처에서 태어났다. 여름만 되면 팬티만 입고 송도해수욕장을 오가던 개구장이였다. 


중학교 때는 가방에 책 대신 야구 글러브를 넣고 다닐 정도로 야구에만 미쳐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영화 <친구>에 나오는 교사 못지않은 선생님들한테 자주 맞아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981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데모하다 얻어맞는 여학생을 보고 충격받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겁이 많아서인지 결국 혁명가의 꿈을 접고 공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85년 대학원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에 대한 미련이 컸지만 대학원 과정 때 우연히 접하게 된 하이데거에 매료되어 석사학위 논문으로 <마르틴 하이데거에 있어서 해석학의 문제>를 썼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1985년부터 번역을 시작해 첫 작품으로 슈내델바하(Herbert Schnaedelbach)』가 지은 『헤겔 이후의 역사철학』을 냈다. 

그 후 지금까지 평균 1년에 한 권 정도 번역 작업을 해왔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번역병 근무 시절에는 네 권을 번역해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한 권씩 번역한 셈이 되었다.

번역은 진로를 결정하기까지 했다. 


1990년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중앙일보>의 『뉴스위크』였다. 그때 정식으로 기자로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번역하는 기자’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기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운명은 나를 점점 그 쪽으로 몰고갔다.

1991년 『월간중앙』(6월호)에 실린, 김용옥의 『대화』를 비판한 글이 계기가 되어 <문화일보> 학술 담당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번역하는 기자’에서 ‘기사 쓰는 기자’로의 탈바꿈이었다.

<문화일보> 기자 생활 만 3년째 되던 1994년 12월에 <조선일보>의 제의로 이직했다. 


1995년에 건국 대통령 이승만 취재를 바탕으로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을 연재하면서 한국 역사와 교육, 리더십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줄곧 학술·출판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한국 지식인 사회의 명암을 원없이 들여다보았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의 학맥과 학풍』(1995)을 썼다.

2001년부터 1년 동안 독일 뮌헨에서 체류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처한 온갖 문제의 본질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 


뮌헨 연수는 돌이켜보면 공부 방향을 크게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차원적인 철학 공부보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연수에서 돌아와 볼프강 조프스키(Wolfgang Sofsky)의 『폭력사회』와 『안전의 원칙』 그리고 마리트 룰만(Marit Rullmann)의 『여성철학자』를 번역했지만 점점 조선왕조실록에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과연 기본이 있었는가?’라는 궁금증을 풀기 위함이었다.

결론은 조선 초기는 건강했지만 후기는 병리적이라는 것이었다. 


여러 면에서 초기와 후기의 차이를 알게 되면서 『논어』를 비롯한 고전에 대한 접근방법 역시 서로 달랐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후 조상들의 사유와 실천에 큰 영향을 미친 공자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2007년부터 논어 공부를 시작했다. 


5년 후인 2012년 마침내 『논어로 논어를 풀다』라는 책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동양 고전과 조선 역사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상·하)』 반고(班固)의 『한서(총10권)』, 『이한우의 태종실록(총19권)』 등 한국 최초의 완역서들과 저서들을 냈으며 지금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와 진수의 『삼국지』 를 번역하고 있다.

현재 <조선일보>에 “간신열전”을, <월간조선>에 “조선재상열전”을 기고하면서 『논어』 『주역』 등을 리더십 관점에서 강의하고 있다. 10여 년간의 제왕학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이한우의 논어 강의』를 최근 출간했다.


이한우(李翰雨)


논어등반학교 교장

사단법인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

 

주요 경력 

1994~2016 조선일보 기자

2002~2003 조선일보 논설위원

2014~2015 조선일보 문화부장

2016~ 논어 등 제왕학 리더십 강의

 

역서 및 저서

역사·사회철학, 중국사, 조선사 관련 50여 종 이상(총 100여 권)

 

제왕학 입문 전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 석사

고려대학교 영문과 


걸어갈 길

배우는 사람이 있다면, 쉬지 않고 

늘 강의합니다. 실력 양성에 힘쓰면 보람있습니다.

미래세대를 위해서, 손놓지 않고

꼭 해야 하는 번역, 꼭 필요한 저술에 매진합니다.

즐겁게 하루하루! 남김없이

고맙고 좋은 분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월간조선] 《漢書》 완역한 李翰雨 논어등반학교장 “조선은 주자학 탈레반 국가… 지금도 비슷”(2020년 5월호)


⊙ “《한서》, 《사기》보다 훨씬 정확하고 풍부… 사마천이 이야기꾼이라면, 반고는 역사가”
⊙ “역사를 읽는 것은 事理를 배우는 것”
⊙ “문재인 대통령은 아무것도 안 하다가 쇠망의 길 연 漢元帝와 비슷”
⊙‌“지금은 조선 성종 때와 비슷… 기득권 시스템 유연화하면서 中興하지 못하면 쇠락”
⊙‌“이명박·박근혜 때 中興 위한 솔선수범 못 하고 탐욕적으로 굴러갔기 때문에 우파가 지금 벌 받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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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준우


《월간조선》에 ‘시사와 역사로 주역을 읽다-以事讀易’을 연재하고 있는 이한우(李翰雨·59) 논어등반학교 교장(전 《조선일보》 문화부장)이 새 책을 냈다. 중국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의 최고봉(最高峰)으로 평가받는 반고(班固·AD 32~92)의 《한서(漢書)》(전 10권)를 번역한 것이다.

《전한서(前漢書)》라고도 하는 《한서》는 고조(高祖)의 유방(劉邦·BC 247~195)부터 왕망(王莽·BC 45~AD 23)의 신(新·AD 8~23)나라에 이르기까지 230여 년에 걸친 전한(前漢·BC 202~AD 8)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제기’(帝紀·황제의 치세) 12편, ‘표’(表·연표 등) 8편, ‘지’(志·제도, 문화, 지리, 경제, 사상 등) 10편, ‘열전’(列傳·인물전) 70편 등 총 100편 120권으로 되어 있다.

기존에 《한서》 번역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서》의 일부인 열전을 발췌해서 번역한 것이거나, 표는 번역하지 않은 것이었다. 국내에서 《한서》를 전부 번역[완역·完譯]한 것은 이 책이 최초인 셈이다. 번역서에 대해서는 평가가 인색한 풍토이기는 하지만, 《한서》 완역은 우리 시대의 커다란 문화적 성취라고 생각해 이한우 교장을 만났다.

  



  “《漢書》는 經과 史가 겸비된 史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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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이 번역한 《한서》(전 10권).


― 《한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중국 사람에게 《한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잘 모르겠고, 번역된 《한서》를 읽을 한국 사람한테 이 책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우리가 앞으로 중국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려면, 먼저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큰 그림이 있어야 합니다. 좌·우(左·右)를 떠나서 한국 사람이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서를 고른다면 어떤 책을 골라야 할까요? 중국에서 여러 개 왕조가 이어져왔지만, 중국의 모태(母胎)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요? ‘차이나(China)’라는 나라 이름이 진(秦)나라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모태로 볼 수 있는 것은 역시 최초의 거대 제국인 한(漢)나라일 것입니다. 《한서》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한우 교장은 “《한서》는 사서(史書)의 가치 측면에서도 중국 24사(史) 가운데 가장 탁월한 책”이라고 덧붙였다.


― 우리나라에서는 《한서》 완역이 최초인 것으로 아는데, 일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1980년대에 《한서》가 번역되었는데, 일본에도 24사 가운데 완역된 것이 사마천(司馬遷·BC 145~86경)의 《사기(史記)》와 《한서》뿐입니다. 《당서(唐書)》도 안 나와 있어요.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데에는 ‘일본이 그 정도 했으니 우리도 《한서》 완역본 정도는 가져야겠다’ 하는 약간의 의무감도 작용했습니다.”


이한우 교장은 “일본 번역서에 비해 적어도 두 가지는 개선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서》는 역사서지만 사실은 그 밑에 경학[經學·《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등에 대한 학문]이 깔려 있어요. 경(經)과 사(史)가 겸비된 사서(史書)인 거죠. 그런데 일본에서 번역된 《한서》는 원로 역사학자가 번역한 것이다 보니 경학 부분에서 오역(誤譯)과 오류(誤謬)가 많아요. 제가 경(經)을 공부한 것이 이 책을 번역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문장정종》 번역하다 《한서》에 매혹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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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정종》 《대학연의》를 지은 진덕수.


― 다른 하나는 뭔가요.


“《한서》는 고한문(古漢文)인데, 고한문의 핵심은 ‘함축’입니다. 따라서 함축된 언어를 그대로 표현한 후 그에 대한 풀이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나온 《한서》 번역본은 당나라 때 안사고(顔師古·581~645)라는 학자가 《한서》를 풀이해놓은 것을 번역한 것이었어요. 반고의 《한서》가 아니라 안사고 버전의 《한서》를 번역한 셈이죠.”


― 두 책이 많이 다른가요.


“글을 읽는 맛이 많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그렇지만, ‘아래 하(下)’ 자 뒤에 지명(地名)이 오는 경우가 있어요. ‘하부산(下釜山)’하는 식으로…. 한나라 때 ‘하’라는 글자에는 말 그대로 ‘떨어뜨리다’, 즉 ‘함락하다’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 ‘하부산’이라고 하면 ‘부산을 함락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 당나라 때의 ‘하(下)’자 용법이 한나라 때와 달랐다는 것인데, 안사고는 그 점을 자신의 책에서 밝혀놓았나요.


“안사고는 당연히 그 점을 철저하게 밝혀놓았지요. 그런데 일본의 경우 《한서》를 번역하면서 이런 부분을 전부 생략해버렸어요. 그래서 일본에서 나온 《한서》는 드라이하고 읽는 맛이 없어요. 저는 《한서》에 나오는 고한문의 용법에 따라 번역해 원래 맛을 살렸습니다.”


― 《한서》는 어떻게 해서 번역하게 됐습니까.


“송(宋)나라 때 학자 진덕수(眞德秀·1178~1235)가 중국의 여러 책에서 좋은 문장을 뽑아놓은 《문장정종(文章正宗)》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보니 실린 글 가운데 4분의 1이 《한서》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뽑은 문장보다 더 많았어요. 그걸 보고서 ‘아, 진덕수는 《한서》의 문장을 최고(最高)로 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장정종》 속에 실린 《한서》의 문장을 읽다 보니 《한서》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또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는 모두 한나라 초기 역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잖아요. 역사가 겹치는 부분에 대한 진덕수의 평가를 보니, 《한서》에 대한 평가가 훨씬 높았어요. 그래서 2015년 중반부터 《한서》 번역에 들어가 2018년에 마쳤습니다.”



古今人表(고금인표)


― 2018년에 번역을 마쳤는데, 책이 이제야 나온 이유는 뭡니까.


“교열을 한 번 보는 데 4개월씩 걸렸거든요. 교열을 세 번 봤습니다. 그러면서 1년이 지나간 거지요.”


― 국내에서 《한서》 완역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열전을 발췌·번역한 게 두 종(種) 있더군요. 완역본이라고 나온 게 하나 있기는 한데, 그것은 표가 빠졌으니 완역이라고 보기는 어렵지요. 번역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눈에 많이 띄고요….”


― ‘표’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표는 기전체 사서에서 핵심입니다. 전(傳·인물전)은 재미있지만 그것만 내버려두면 모래알처럼 날아다니는 것밖에 안 돼요. 그렇다고 골격인 기(紀)만 갖고는 책이 드라이해집니다. 전과 기 사이에서 중간 고리 역할을 하면서 양자를 종횡(縱橫)으로 묶어주는 게 표입니다. 《한서》에는 모두 10개의 표가 있는데, 그중 다른 기전체 사서에는 없고 반고의 《한서》에만 있는 표가 있어요.”


― 그게 뭡니까.


“‘고금인표(古今人表)’라는 것입니다. 역대 인물들을 ‘상상(上上)·상중(上中)·상하(上下)’ 하는 식으로 모두 9등급으로 나누어 표로 만든 것이죠. 이 분류가 정확하냐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있겠지만, 반고라고 하는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 우리나라에서 열전을 비롯해 《사기》는 그나마 많이 번역된 반면에 《한서》가 덜 알려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독서 수준하고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독서 수준이라는 게 《이문열 삼국지》에서 맴도는 수준 아니에요? 《사기》를 읽었다고 해도 일종의 희한한 이야깃거리로서 《사기열전》인 것이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의식을 갖고 《사기》를 읽은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자, 역사 쓸 수 있는 원칙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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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 사마천과 반고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사마천이 인간의 이야기들을 국가에서부터 인사, 경제, 문화, 사회생활, 토목 등에 이르기까지 입체적으로 담아내는 기전체라는 체제를 만들어낸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역사를 쓴다는 게 무엇인가’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기록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척도에서 보면 반고가 훨씬 뛰어나다고 봅니다.”


― 반고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반고가 철저하게 공자(孔子) 정신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마천에게도 공자가 《춘추(春秋)》를 쓴 이후 500년 만에 그 연장선상에서 《사기》를 쓴다는 자부심이 있었죠. 하지만 사마천은 유가적(儒家的)인 면이 있지만, 도가(道家)에 대해서도 열려 있었지요. 반면에 반고는 정통 유가이자 사가(史家) 집안 출신으로 그에 대한 프라이드를 가진 전문가였습니다.”


― 구체적으로 ‘공자 정신’이라는 게 뭡니까.


“우리는 흔히 공자를 ‘도덕교사’라고 생각하지만, 공자의 가장 위대한 점은 역사를 쓸 수 있는 원칙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 그 ‘원칙’이 뭔가요.


“사리(事理), 즉 예(禮)입니다. 여기서 예라고 함은 예법(禮法) 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사리라는 기준이 있어야 역사 서술이 가능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도가 입장에서 중국 역사를 쓴 책이 나올 수 있을까요?”


― 안되겠죠.


“‘떠나자’는 입장을 가진 도가에서는 역사를 쓸 수 없어요. 역사는 기본적으로 세속(世俗)이니까. 탈(脫)세속 가지고 역사를 쓸 수 있겠어요? 불교는 어떨까요. 불교 입장에서 불교사(佛敎史)는 쓸 수 있을지 몰라도, 역사는 쓸 수 없을 것입니다. 《한서》와 《사기》를 번역하면서 공자의 역사가로서 면모를 보게 되었어요.”



사마천과 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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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


― 반고의 《한서》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가 유교적 입장에 철저하기 때문입니까.


“그런 것만은 아니고 내용적으로도 《사기》보다 훨씬 정확하고 풍부합니다. 중국에서는 ‘사마천이 일가(一家)를 이루고 싶은 욕심에 글에다 멋을 부리느라고 실상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았다’고 평가합니다. 그 오류를 반고가 많이 바로잡았습니다. 사마천이 이야기꾼이라면 반고는 말 그대로 진짜 역사 저술가라고 할까요.

또한 철저하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장을 모델로 한 반고는 문체(文體)가 단아합니다. 반면 사마천은 성격이 격정적이다 보니 글에서도 그런 면이 나타납니다. 중국 송나라 때 문인인 양만리(楊萬里·1127~1206)는 사마천을 이백(李白), 반고를 두보(杜甫)에 비유했는데, 공감이 갑니다.”


― 반고와 사마천의 그런 차이는, 반고는 유교가 관학(官學) 이데올로기로 정립된 후의 사람인 반면 사마천은 그 이전 사람이기 때문 아닐까요.


“물론이죠. 사마천이 살던 시기는 한무제(漢武帝·BC 156~87) 때인데, 바로 동중서(董仲舒·BC 176~104경)가 사상적 통일을 시도한 때였죠. 사마천은 그 이전 시대를 살아온, 일종의 ‘사상의 자유시장’이 있던 때의 사람입니다. 반고는 전한(前漢) 시대가 지나가고 난 후인 후한(後漢) 때 사람이었죠. 후한은 광무제(光武帝·BC 6~AD 57) 자신이 유생(儒生)이고, 반고가 살던 시대의 황제인 명제(明帝·28~75)도 유학에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마천과 반고의 역사 서술에는 개인적 캐릭터뿐 아니라 시대적 성격도 작용했겠죠.”



태종과 세종의 대화


― 조선시대 역사에서 경연(經筵)에 등장하는 책을 보면, 사서(史書)보다는 경서(經書)에 무게를 둔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전적으로 성리학(性理學) 때문이죠. 조선 초만 해도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성리학이 그렇게 지배적이 아니었을 때에도 신하들은 기본적으로 임금이 경(經)을 읽기 바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원칙대로 하라’는 것이죠. 반면에 임금은 사(史)를 읽고 싶어 합니다. 역사는 권도(權道)거든요.”


― 재미있네요.


“세종이 얼마나 영리한가 하면 말이죠, 세종은 임금이 되자마자 경연에서 연속으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었습니다. 송나라 진덕수가 지은 《대학연의》는 중국의 역사적 사실들을 가지고 《대학》을 풀이한, 경(經)과 사(史)가 통합되어 있는 책이거든요. 타협책인 거죠. ‘너희가 나에게 경(經)을 읽으라고 하는데, 《대학연의》에는 경(經)도 있고 사(史)도 있다’는 것인데, 사실 세종의 마음은 사(史)에 있던 거죠. 그게 강한 임금들이 갖고 있는 훌륭한 특성입니다. 조선 중기 이후로 가면 사서를 읽는 임금은 거의 보기 어려워집니다.”


― 저도 경(經)보다 사(史)가 더 재미있습니다.


“당연하죠. 사실 조선 초에 《한서》는 이미 식자(識者)들의 필독서였어요. 실록을 보면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황희(黃喜)를 다시 불러다 쓰라’고 하면서 딱 한마디 합니다. ‘황희는 사단(師丹·?~3)이다.’ 그러자 세종은 ‘예, 알겠습니다’라고 하죠. 이는 두 사람이 사단을 모르면 오갈 수 없는 대화죠.”


― 사단이 누구인가요.


“한나라 원제(元帝·BC 75~33)에서 성제(成帝·BC 51~7)로 넘어가는 시기의 인물인데, 성제의 스승이었습니다. 원래 원제는 성제가 태자 시절에 잘못을 많이 저지르자 그를 폐(廢)하려고 했어요. 그때 사단이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합니다. 그러자 원제는 ‘사단은 내가 마음을 바꾸기를 기대하고 태자를 폐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해요. 그렇게 해서 성제가 마음을 돌리면 사단은 태자(성제)에게 영웅이 될 테니까요.”


― 황희가 양녕대군을 폐하는 것을 반대했을 때, 태종도 황희에게 그런 의심을 품었죠.


“바로 그겁니다. 원제는 나중에 사단이 그런 잔머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사단을 중용합니다. 태종과 세종 모두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 짧습니다. ‘황희는 사단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걸로 끝나는 거죠.

리더들 간의 대화는 이래야 합니다. 미주알고주알 할 필요가 없어요.”



“線을 지키라는 것이 《한서》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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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


― 《한서》 속 인물 중에서 인상적인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당연히 고조 유방이죠. 유방과 그를 중심으로 한 인물 군상(群像)…. 우리는 장량(張良·?~BC 186)이나 소하(蕭何·?~BC 193)가 유방의 무한(無限) 총애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한서》를 보면 두 사람이 조심조심하다가 조용히 물러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요. 아무리 (최고 권력자와) 가까운 것 같아도 선(線)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 《한서》는 일관되게 그 길을 택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간언(諫言)을 해도 정도껏 하라는 것이죠. 대표적인 사람이 한문제(漢文帝) 때의 신하인 원앙(袁盎·?~?)입니다. 원앙이 직언극간(直言極諫)하는 성격인데, 결국 비참하게 죽습니다. 반고라는 사람이 참 대단하다 싶은 게, 그는 원앙을 곧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면서도 ‘불경불식(不經不式)’이라고 평합니다.”


―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런 사람을 자기 마음의 원칙이나 행동의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직언극간하는 사람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반고는 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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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

― 저도 어렸을 때는 역사책을 보면서 직언극간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훌륭하게 여겼는데, 요즘 들어서는 적당하게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직언극간하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는 게 바로 《한서》 같은 책을 읽지 않아서 생긴 폐단입니다. 《한서》 같은 책을 일찍 읽었다면 우리는 훨씬 깊은 안목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한서열전》에서 공로를 세워 영달한 인물의 후손들이 불초(不肖)해서 집안 망치는 얘기를 보면 재벌 3, 4세들이 회사 말아먹는 게 떠오르더군요.


“짤막짤막하게 나오기는 하지만 표(表)를 보면 그런 게 한눈에 들어옵니다. 표가 주는 재미 중 하나가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죠. 그것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바로 ‘경(敬·삼감)’입니다. 삼가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은 자식을 비명횡사(非命橫死)하라고 부추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歷史觀보다 중요한 게 事理”


― 옛날에 나온 책이든지 요즘 나온 책이든지 간에 중국 역사책들을 보면 역사에서 교훈을 도출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느껴지곤 합니다. 이것도 성리학의 영향 때문일까요.


“그보다는 우리가 서양 역사에 익숙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물론 너무 유치하게 교훈에 집착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가 역사를 읽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배우기 위해서 아니겠어요? 그게 아까 말한 사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넓게 보아서 그때나 지금이나 관통하는 사리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쓸 수 있는 지적(知的) 베이스가 되는 것이죠. 우리가 역사관(歷史觀) 운운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게 사리 같아요. 사리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이 옛날 얘기 백날 써놓으면 뭐 하겠어요?”


이한우 교장은 “그런 점에서 중국인들이 사리에 입각해 역사를 쓰려고 한 것은 대단하다”고 평했다.


“그런데 중국에도 《한서》 이후에는 그만한 역사서가 없어요. 《후한서》하고 《신당서》를 조금 봤는데, 《한서》를 보다가 그걸 보니 격이 떨어져서 못 보겠더라고요. 인간 군상이 살아가는 모습을 리얼하게 그리면서도 정확하게 이치로 포착하고 평가해낸 게 《한서》이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끊임없이 《한서》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한우 교장은 “이 문제에 대한 질문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기록을 위해 내가 미리 얘기해놓으려는 것인데, 《조선왕조실록》의 한문 수준은 어느 정도일 것 같으냐”고 물었다.


― 어느 정도입니까.


“한마디로 ‘필리핀 영어’.”


― 어이쿠!


  “역시 네이티브(native)하고 다른 게, 중국 한문에 담긴 아주 묘한 뉘앙스를 따라가지 못해요. 내가 《태종실록》 《한서》도 번역했는데, 《실록》에는 글이 주는 짜릿함이 없어요. 그저 의미만 전달하는 정도라고 할까.” 



이어지는 인터뷰 전문은  월간조선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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