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반갑습니다. 이한우입니다.

걸어온 길

1961년 부산 송도해수욕장 근처에서 태어났다. 여름만 되면 팬티만 입고 송도해수욕장을 오가던 개구장이였다. 


중학교 때는 가방에 책 대신 야구 글러브를 넣고 다닐 정도로 야구에만 미쳐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영화 <친구>에 나오는 교사 못지않은 선생님들한테 자주 맞아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981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데모하다 얻어맞는 여학생을 보고 충격받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겁이 많아서인지 결국 혁명가의 꿈을 접고 공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85년 대학원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에 대한 미련이 컸지만 대학원 과정 때 우연히 접하게 된 하이데거에 매료되어 석사학위 논문으로 <마르틴 하이데거에 있어서 해석학의 문제>를 썼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1985년부터 번역을 시작해 첫 작품으로 슈내델바하(Herbert Schnaedelbach)』가 지은 『헤겔 이후의 역사철학』을 냈다. 

그 후 지금까지 평균 1년에 한 권 정도 번역 작업을 해왔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번역병 근무 시절에는 네 권을 번역해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한 권씩 번역한 셈이 되었다.

번역은 진로를 결정하기까지 했다. 


1990년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중앙일보>의 『뉴스위크』였다. 그때 정식으로 기자로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번역하는 기자’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기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운명은 나를 점점 그 쪽으로 몰고갔다.

1991년 『월간중앙』(6월호)에 실린, 김용옥의 『대화』를 비판한 글이 계기가 되어 <문화일보> 학술 담당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번역하는 기자’에서 ‘기사 쓰는 기자’로의 탈바꿈이었다.

<문화일보> 기자 생활 만 3년째 되던 1994년 12월에 <조선일보>의 제의로 이직했다. 


1995년에 건국 대통령 이승만 취재를 바탕으로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을 연재하면서 한국 역사와 교육, 리더십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줄곧 학술·출판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한국 지식인 사회의 명암을 원없이 들여다보았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의 학맥과 학풍』(1995)을 썼다.

2001년부터 1년 동안 독일 뮌헨에서 체류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처한 온갖 문제의 본질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 


뮌헨 연수는 돌이켜보면 공부 방향을 크게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차원적인 철학 공부보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연수에서 돌아와 볼프강 조프스키(Wolfgang Sofsky)의 『폭력사회』와 『안전의 원칙』 그리고 마리트 룰만(Marit Rullmann)의 『여성철학자』를 번역했지만 점점 조선왕조실록에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과연 기본이 있었는가?’라는 궁금증을 풀기 위함이었다.

결론은 조선 초기는 건강했지만 후기는 병리적이라는 것이었다. 


여러 면에서 초기와 후기의 차이를 알게 되면서 『논어』를 비롯한 고전에 대한 접근방법 역시 서로 달랐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후 조상들의 사유와 실천에 큰 영향을 미친 공자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2007년부터 논어 공부를 시작했다. 


5년 후인 2012년 마침내 『논어로 논어를 풀다』라는 책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동양 고전과 조선 역사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상·하)』 반고(班固)의 『한서(총10권)』, 『이한우의 태종실록(총19권)』 등 한국 최초의 완역서들과 저서들을 냈으며 지금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와 진수의 『삼국지』 를 번역하고 있다.

현재 <조선일보>에 “간신열전”을, <월간조선>에 “조선재상열전”을 기고하면서 『논어』 『주역』 등을 리더십 관점에서 강의하고 있다. 10여 년간의 제왕학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이한우의 논어 강의』를 최근 출간했다.


이한우(李翰雨)


논어등반학교 교장

사단법인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

 

주요 경력 

1994~2016 조선일보 기자

2002~2003 조선일보 논설위원

2014~2015 조선일보 문화부장

2016~ 논어 등 제왕학 리더십 강의

 

역서 및 저서

역사·사회철학, 중국사, 조선사 관련 50여 종 이상(총 100여 권)

 

제왕학 입문 전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 석사

고려대학교 영문과 


걸어갈 길

배우는 사람이 있다면, 쉬지 않고 

늘 강의합니다. 실력 양성에 힘쓰면 보람있습니다.

미래세대를 위해서, 손놓지 않고

꼭 해야 하는 번역, 꼭 필요한 저술에 매진합니다.

즐겁게 하루하루! 남김없이

고맙고 좋은 분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월간조선] “太宗, 시대적 과제를 先制的으로 파악해서 그걸 향해 나아간 사람”(202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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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宗의 삶을 한 단어로 말하면 至公… 자기가 권세를 누리고 싶은 마음을 절제하고 국가를 번성시키는 일을 자기의 業으로 여기는 마음”
⊙ “태종,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항상 신하와 함께 일을 추진”
⊙ ‘인재란 다 갖춰진 사람을 구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 천하에 어찌 쓰지 못할 자가 있겠는가?’(태종)
⊙ 政敵 정도전의 아들 정진, 위화도 회군 告變者 최유경 등 중용… 인재 등용의 기준은 곧음[直]
⊙ “論功行賞은 功이 있는 자에게 賞은 줘도 자리는 주지 말라는 의미… 功臣은 私”



《월간조선》에 ‘신당의통략(新黨議通略)’을 연재하고 있는 이한우(李翰雨·61) 논어등반학교 교장을 보면, 이름 그대로의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글[翰]을 비[雨]처럼 쏟아내는 사람이다. 20대 시절부터 저술 작업을 해온 그는 지금까지 100권 가까운 저서(著書)와 역서(譯書)를 펴냈다. 최근 그는 자신의 저서 리스트에 또 다른 대작(大作)들을 보탰다. 하나는 2017년에 시작해서 작년 12월에 완간(完刊)한 《이한우의 태종실록》(21세기 북스 펴냄)이다. 《이한우의 태종실록 별책》까지 합쳐 모두 19권에 달한다. 다른 하나는 《이한우의 태종 이방원(상, 하)》이다. ‘태종풍(太宗風) 탐구’라는 부제(副題)가 눈길을 끈다. 그는 2005년에는 ‘군주열전’ 시리즈의 하나로 《태종-조선의 길을 열다》(해냄)를 펴낸 바 있다. 17년간 태종을 ‘탐구’해온 셈이다.


마침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1367~1422년)이 여러 가지로 재조명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KBS는 5년여 만에 다시 대하사극을 방송하기 시작했는데, 제목부터가 〈태종 이방원〉이다. 과거 〈용의 눈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 등의 사극에서 태종 이방원이 등장한 적은 있지만, 온전히 ‘태종 이방원’을 중심에 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월부터 시작된 이 드라마는 중간에 잠시 방송을 중단하는 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8~11%대의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가(家)’에서 ‘국(國)’으로라는 부제가 인상적이다.


태종 이방원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고려말 조선 초기의 난세(亂世)를 수습하고 조선왕조를 반석(盤石)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세종(世宗) 시대의 태평은 이방원이 그 길을 닦아놓은 덕분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공신(功臣)들과 처남들을 가차 없이 처단했다. 처남 네 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는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1375~1419년)까지 죽였다. 자신과 아들의 처가를 박살 낸 것은 외척(外戚)의 발호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태종의 리더십과 친인척·측근 관리는 새 대통령의 당선과 맞물리면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울 관훈동에 있는 경제사회연구원 사무실에서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을 만났다.




태종과 朴正熙


― 20년 가까이 태종을 봐왔는데, 그렇게까지 태종에게 매료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벌써 그렇게 됐네요. 태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3년에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라는 책을 내면서부터였어요. ‘세종에게 길을 닦아준 사람이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람’이라는 것이 태종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잖아요? 태종이 세종을 위해 어떻게 준비를 해줬나를 알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니 결국 태종, 정종(定宗), 태조(太祖)까지 살펴보게 되었는데, 그때 큰 충격을 받았어요.”


― 어떤 충격입니까.


“태종은 시대적 과제를 선제적(先制的)으로 파악해서 그걸 향해 나아간 사람이라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러니 신하들 중에서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권세나 누리려던 사람들이 나자빠지는 거지. 그걸 보고 나니 태종은 대단한 정치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도 선제적으로 과제를 파악해 돌파하면서 이루어가는 것이 리더, 특히 국가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태종을 보면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고 했던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떠오르더군요.”


― 태종에게 있어서 시대적 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고려 말기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아파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죠. 고려 말기 사회는 겉으로는 귀족(貴族)이라고 하지만 실은 작은 군벌(軍閥)이 사병(私兵)에 대한 군권(軍權)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고 있었지요. 물론 이성계(李成桂·1335~1408년)도 마찬가지였죠. ‘나도 저런 군벌, 귀족이 되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군벌, 귀족들에게 당하며 사는 백성의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을 마음 아파했다는 것이 태종의 위대한 점입니다.”


‘백성의 고통을 마음 아파한 임금’


― 태종이 백성들의 고통을 아파하고 그것을 해결해주려 노력했다는 것이 실제로 실록에서 보입니까.


“보이죠. 태종은 말로만 백성을 사랑하라고 한 게 아니라 백성에 대한 사랑을 체화(體化)한 임금이었습니다. 태종 6년(1406년) 청계천 공사를 할 때에 태종은 야간작업을 금지하고 공사 현장에 의원(醫員)들을 배치했어요. 공사를 마친 후 노역에 동원됐던 백성들이 귀향(歸鄕)할 때에는 그들이 한강을 서둘러 건너다가 사고라도 날까 봐 관원들을 보내서 살피게 했어요. 지금도 그런 리더를 보기가 어렵잖아요?”

 

《태종 이방원》에는 태종의 애민(愛民)정신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여럿 나온다.


태종 12년(1412년) 태종은 “누문(樓門)의 노대(路臺)에 깔아야 할 돌도 1만 개이면 충분할 텐데 선군(船軍)으로 하여금 3만 개씩이나 실어오게 해 내 백성[吾民]을 수고롭게 함은 무슨 짓이냐?”면서 신하들을 질책한다. 이한우 교장은 “‘내 백성’이라는 말이 가슴을 파고든다”고 했다.


태종 16년(1416년)에 왜(倭)의 포로가 되었다가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으로 팔려간 우리 백성들이 매우 많다는 말을 듣고, 태종이 이예(李藝·1373~1445년)를 보내 이들을 데려오라고 하는 얘기도 나온다. 호조판서 황희(黃喜)가 ‘수로(水路)가 험하고 멀며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반대하지만, 태종은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것은 본래 귀천(貴賤)에 따른 차이가 없다’며 황희의 진언을 일축한다.



私兵 혁파와 文臣 정치의 출현


이한우 교장은 “저는 이런 사례들이 일회성(一回性)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태종은 처음부터 어떻게 해야 백성들에게 고통이 되지 않는 정치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태종이 정종 2년(1400년) 세자가 된 후 전격적으로 사병 혁파(革罷)를 하잖아요. 사병 혁파라는 게 단순히 정치투쟁이 아니에요. 사병을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군권을 가진 자들이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차단하고, 비로소 문신(文臣)들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에 의한 정치의 영역’이 탄생하는 것이죠. 이는 왕명(王命)이 정립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명이 정립되어야 백성들을 위한 좋은 정치를 하려는 왕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 그렇군요.


“태종은 이런 정치체제에 대한 구상을 상당히 일찍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태종은 조선 건국 후 아버지 시대 7년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정도전(鄭道傳·1342~1398년)이나 남은(南誾·1354~1398년)이 하는 정치는 고려말의 연장선이었잖아요. 태종은 그걸 보면서 ‘이럴 거면 무엇 때문에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했지’ 하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 하지만 정도전도 사병 혁파를 추진했었죠.


“정도전이 그걸 일찍 추진했으면 나름 설득력을 가졌겠지요. 하지만 명(明)나라에서 정도전을 겨냥해 계속 압력을 가해오니 그걸 회피하기 위해 요동정벌을 추진한다고 하면서 사병 혁파를 추진하는 한편 이를 통해 이방원을 잡으려고 하다가 제1차 왕자의 난을 당하게 된 거죠. 사병 혁파라는 겉모습은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정도전이 추진했던 사병 혁파는 신권(臣權) 강화를 위한 것이었고, 이방원이 추진했던 것은 왕권(王權) 강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도 2005년에 태종에 대해 쓸 때에는 사병 혁파의 의미를 잘 몰랐어요. 실록까지 번역하면서 보니 사병 혁파와 문신 정치의 탄생이 연결된다는 것이 보이더군요.”


― 태종의 그런 시스템 개혁에 대한 구상은 대략 언제쯤부터 시작됐을까요.


“태종이 젊어서부터 선비들에게 자신을 낮추었다는 얘기가 나와요. 귀한 사람이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유가(儒家)에서 핵심적인 것인데, 이는 태종이 위민(爲民) 정치를 위한 인적·물적 토대를 갖추기 위해 상당히 일찍부터 준비를 해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조선 임금 중 유일한 ‘文科 급제자’


이한우 교장은 “사병 혁파 이후 문신정치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다음은 결국 왕이 신하를 고르게 되면서 지인지감(知人之鑑)의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인지감’은 이한우 교장이 천착(穿鑿)해온 문제 중 하나다. 그는 공자(孔子)의 말씀을 담은 《논어(論語)》를 ‘선비의 심신수양서’가 아니라 ‘군왕(君王)을 위한 지인지감 교과서’로 본다. 그런 관점에서 《월간조선》에 ‘이한우의 지인지감’을 연재하고, 책으로 내기도 했다.


― 태종 이방원의 지인지감은 어떻게 길러진 것일까요.


“태종은 조선 임금 가운데서 유일한 문과(文科) 급제자였습니다[우왕 10년(1383년) 문과에서 33명 중 10등으로 급제]. 임금에 오르기 전 ‘문과 급제’라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자 고려말 조정 관리로 근무하면서 유능한 인재들을 직접 살펴볼 기회가 있었던 것이 집권 후 큰 힘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문신들이 원하는 바를 알고, 그들의 장단점을 접하면서 대등한 차원에서 사람들을 접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훗날 인재 발탁에 큰 도움이 됐을 겁니다. 아무래도 왕자나 세자로 있다가 임금이 된 사람들보다는 낮은 눈높이에서 사람 보는 눈을 익혔겠지요. 그리고 《주역(周易)》 《논어》 《한서(漢書)》 《대학연의(大學衍義)》 등에 대한 태종의 이해(理解)는 당대 문신들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이었습니다.”


― 여태까지 나온 ‘태종 3종 세트’의 특징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시죠.


“2005년 군주열전 시리즈로 나온 《태종》은 가벼운 입문서, 19권의 《태종실록》은 실제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죠. 이번에 쓴 《태종 이방원》은 제가 지난 20년 동안 해온 동양·우리나라 역사와 경전(經典) 연구의 총화(總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해온 역사·경전 연구의 총화’라는 말에서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태종 이방원》을 단순히 ‘태종 리더십’에 대한 책으로 여기고 선택한 사람들은 책 중에서 수시로 《논어》와 《주역》 《대학(大學)》 《중용(中庸)》 같은 경서(經書)나 《한서》 《대학연의》 같은 사서(史書)의 내용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질려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단순한 평전(評傳)이나 리더십 교과서로 생각하고 책을 집어 든 사람들은 《태종 이방원》을 읽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모르고 그 사람의 평전을 쓰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이건 저 자신이 너무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문제입니다.

2005년 《태종》을 쓸 때만 해도 태종이 수련한 학문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태종의 심사(深思), 즉 그의 정신세계를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려냈던 태종은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즉 ‘타고난 정치적 인간’이었습니다. 태종의 정치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겉으로 나타난 모습들로만 이해했지요. 그동안의 경전 공부와 역사 공부를 통해 태종의 정신세계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된 후에 태종을 다시 보니, 그가 정치적 숙청을 할 때에 왕실 사람과 처가 사람들을 왜 다르게 취급했는지, 공신들을 왜 그렇게 다루었는지 등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至公은 ‘스스로 내려놓는 것’”


― 태종을 통해 우리 시대에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지공(至公)이죠. 태종의 삶을 한 단어로 말하면 지공입니다.”


― 조금 막연한 얘기 같은데, 지공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한마디로 ‘스스로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능하다는 것도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일을 해보았기 때문에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도 얼마든지 중용(重用)하고 그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죠. 이런 자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태종에게 뛰어난 인재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이죠.”


― ‘자기를 내려놓는다’는 표현은 요즘 정치인들도 참 많이 하죠.


“말로는 많이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 ‘자기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 허기(虛己)입니다. 자기가 권세를 누리고 싶은 마음을 절제하고 국가-옛날에는 종묘사직(宗廟社稷)-를 번성시키는 일을 자기의 업(業)으로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李承晩)·박정희 대통령은 뛰어난 분들이기는 했지만 지공은 아니었던 거죠. 만일 그분들이 지공의 전통을 남겼더라면 좌파(左派)들이 이렇게 설쳐댈 빌미도 안 줬을 것입니다.”


― 그런 의미에서라면 재선(再選) 임기 8년을 마친 후 권좌에서 내려온 미국의 초대(初代)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지공을 실천한 경우겠군요.


“바로 그거죠. 그리고 덩샤오핑(鄧小平)도 자신이 가진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은 경우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잣대로 보면 시진핑(習近平) 같은 경우는 완전히 3류입니다. 우리는 그것만 봐도 결국 저 나라가 잘 안 되고 있다는 것, 향후 어찌 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剛明한 군주


― 태종의 역사적 의미, 역할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당시로 돌아가서 말한다면, 태종으로 인해 더 이상 고려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해야겠지요. 흔히 그렇게 된 것은 세종 시절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태종 치세 18년을 거치면서 조선에서는 더 이상 고려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어지고, ‘이젠 조선에서 살아야겠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죠.”


이한우 교장은 태종을 두고 ‘강명(剛明)하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태조 이성계는 태종이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자 “강명한 임금이니 권세가 반드시 아래로 옮겨가지는 않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 태종을 두고 ‘강명하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강(剛)은 ‘뛰어나지 않은 자가 진출하는 것을 막아내서 뛰어난 자들이 자리에 있도록 한결같이 노력하는 것’을, 명(明)은 ‘뛰어나거나 뛰어나지 않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말합니다.

원래 ‘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명’입니다. 먼저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하니까요. 선조(宣祖) 같은 경우는 사람을 볼 줄 하는 명군(明君)이기는 하지만 강군(剛君)은 아니었습니다. 지켜줘야 할 사람을 오래 지켜주지 못했죠. 그때 인재가 엄청 많았는데….”


― 조선 시대 임금으로 강명했던 사람은 누굴 꼽을 수 있을까요.


“태종, 세종, 그리고 숙종(肅宗)을 들 수 있겠죠.”



이세민과 이방원


시법(諡法)에서 ‘태종’이라는 묘호(廟號)는 흔히 개국 초기의 난세를 수습하고 태평천하를 이룬 사람에게 붙는다. 당(唐)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대표적이다.


― 당 태종 이세민의 경우 말년이 되면 간언(諫言)을 점차 멀리하고 후계구도를 잘못 짜는 등 밝음[明]이 흐려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태종 이방원이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시경종(愼始敬終), 시작을 신중하게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마무리를 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임금이 끝마무리를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후계자를 잘 고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태종 이방원은 후계자를 잘 길렀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을 기르고 가려내는 일도 잘했어요. 세종에게 넘길 만한 신하는 넘기고, 그렇지 않은 신하는 솎아냈죠. 세상에 이런 임금이 어디 있어요?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해주었는데도 못하면 그게 바보죠. 그런데 세종은 ‘경종’을 하지 못했어요.”


― 세종과 문종(文宗)이 죽은 후에 단종(端宗) 때에 김종서(金宗瑞·1383~1453년)·황보인(皇甫仁·1387~1453년) 등의 전횡, 그리고 세조(世祖)의 정변이 있었죠.


“그렇죠. 임금이 준비를 안 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태종은 일에 임하는 자세가 처음부터 끝까지 공(公)이었고, 한순간도 그걸 놓치지 않았어요.”



‘반드시 재상에게 물었다’


― 태종이 일관되게 그런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태종은 어떤 일이 발생하면 반드시 하륜(河崙·1348~1416년)이나 박은(朴·1370~1422년) 같은 재상(宰相)에게 의견을 물었어요. 혼자서 결정하는 법이 없어요.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그러는 과정을 통해 공론(公論)을 만들어나가는 거죠. 재상에게만 물은 게 아닙니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을 늘 실천했어요.”


― 재상에게 의견을 물은 후 받아들이는 자세는 어땠습니까.


“완전 오픈 마인드(open mind)!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어요. 항상 신하와 함께했어요. 관제(官制)개혁을 할 때에는 하륜, 사병 혁파를 할 때에는 대사헌(大司憲) 권근(權近)에게 상소를 올리게 해서 일을 추진했지요.

이게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태종의 리더십 중 하나입니다. 이미 자신도 다 아는 것이지만, 그것을 할 수 있는 신하가 있으면 그 신하와 의논을 해서 마치 그 신하가 한 일인 것처럼 만들어나가는 것이죠.”


― 그런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세종)으로 세자를 바꿀 때, 태종은 물론 자기 생각이 있으면서도, 신하들에게 적당한 사람이 누구인지 추천해보라면서 신하들과 핑퐁을 하잖아요. 그러다가 신하들의 의견을 수용하는 형식으로 충녕대군을 세자로 정했죠. 후일 박은이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울 때의 공로를 내세우면서 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태종은 ‘그 당시에 큰 의견을 결정하기는 실로 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밖의 토의로 된 것이 아니거늘 박은 등이 무슨 공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천하에 쓰지 못할 자가 있겠는가?”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인사(人事)’이다. ‘인사가 만사(萬事)’라고 말했던 대통령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망사(亡事)로 이어졌다는 조롱을 받았다. 《태종 이방원》을 읽다 보면 인사와 관련해 눈이 번쩍 뜨이는 대목들이 있다.


“인재란 다 갖춰진 사람을 구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란) 비록 이 점에서는 미흡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저 점에서는 달통할 것이니 천하에 어찌 쓰지 못할 자가 있겠는가?”


“이직(李稷·1362~1431년)과 황희는 비록 죄를 범하기는 했으나 일에 정통한 구인(舊人·앞 시대의 인재)이므로 버릴 수 없다. 가히 불러서 쓸 만하다.”

 

인사청문회 때마다 위장 전입이니 부동산 투기, 소셜미디어(SNS)니 하는 걸로 사람의 발목을 잡는 시절에 참으로 상쾌한 이야기다.


또 하나 태종 이방원의 인사를 보면 그야말로 인사의 폭이 넓다는 생각이 든다. 하륜, 권근, 황희 등은 당초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이지만, 내내 중용됐다.


조선 개국이나 이방원에게 반대했던 이들도 적극적으로 썼다. 대사헌을 지낸 최유경(崔有慶·1260~1334년)은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 밑에 있다가 우왕과 최영에게 달려가 쿠데타 발생 사실을 알린 인물이다. 태종 이방원의 가장 큰 정적(政敵)이었던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鄭津·1361~1427년)은 한때 수군(水軍)으로 충원(充員)되었지만 다시 벼슬길에 올라 판한성부사(서울시장)를 거쳐 공조판서·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태종은 자기가 죽인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아들 정종성과 정종본도 등용했지만, 본인들이 불초해서 높이 올라가지는 못했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한편이 되어 태종에게 맞서다가 죽은 남은의 경우 태종 대에 태조(太祖)의 배향공신(配享功臣)이 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剛直(강직)과 忠直(충직)


― 태종이 사람을 쓰는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곧음[直]이었죠. 단점이 있다고 해도 그 바탕이 곧다고 생각하면 썼습니다. 대신 곧지 못하면[不直], 죽음을 면치 못했지요. 그런데 곧음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 어떤 게 있습니까.


“제일 좋은 것은 순직(純直)입니다. 마음속에 간사함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순전히 곧다는 뜻입니다.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讓位)하면서 ‘충녕은 순직하니 대임(大任)을 맡길 만하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은 강직(剛直) 또는 경직(直)인데, 굳세고 곧은 것을 말합니다. 영의정을 지낸 유정현(柳廷顯·1355~1426년)이 이에 해당합니다. 임금에게 할 말은 하는 유형이죠.”


― 또 있습니까.


“다음으로 공직(公直)이 있습니다. 공평정직(公平正直)하다는 말입니다. 이성계의 호위무사 출신으로 좌의정까지 오른 조영무(趙英茂·1338~1414년) 같은 사람이 해당됩니다. 조영무에 대해 태종은 질직(質直)하다고도 했는데 ‘바탕이 곧다’는 뜻입니다.

충직(忠直)은 좌의정을 지낸 박은 같은 사람이 이에 해당하는데, 자칫하면 임금의 뜻에만 맞추는 것으로 비칠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눌직(訥直)이 있는데, ‘말은 어눌하지만 마음속은 곧은 것’을 말합니다.

가장 흔한 경우로 정직, 근직(勤直), 질직, 후직(厚直)이 있습니다. 정직, 질직, 후직은 대체로 다른 능력은 없이 부지런하거나 묵묵히 맡은 바 일을 잘 해내는 사람에게 썼는데, 토목공사에 능해 청계천 공사 등을 맡은 박자청(朴子靑·1357~1423년)이 그런 경우입니다. 후직은 마음가짐이나 남을 대하는 태도 면에서 두터웠다는 뜻으로, 그 밖의 다른 능력은 없는 경우에 쓰였습니다.”


拙直(졸직)했던 맹사성, 狂直(광직)했던 이숙번


― 재미있네요.


“순직은 고분고분하고 곧은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환관(宦官)에 대해 쓰였습니다. 졸직(拙直)은 ‘다소 고지식하면서도 곧은 것’을 말하는데, 세종 때에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孟思誠·1360~1438년)이 이에 해당합니다.

‘어리석고 곧다’는 우직(愚直)은 많이 들어보았겠지만, 치직(癡直)이라고도 합니다. 태종은 대마도를 정벌한 무장 이종무(李從茂·1360~1425년)를 치직하다고 평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못을 범해도 악의(惡意)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봐서 어지간한 잘못을 해도 용서를 했습니다. 곧음의 맨 끝에 있는 것은 광직(狂直)입니다.”


― 그건 어떤 겁니까.


“‘너무 솔직하다’는 의미인데, 요즘 말로 하면 ‘또라이 기질이 있지만 바탕은 곧다’쯤 될 것입니다. 누구일까요?”


― 이숙번(李叔蕃·1373~1440년) 아닌가요.


이숙번은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웠던 태종의 최측근 가운데 한 명이다.


“맞아요. 태종은 어린 세종이 그를 제어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내쳤지만 ‘광직하니 죽일 것은 없다’면서 목숨은 살려주었습니다.”


― 곧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그 선을 넘어 부직(不直)한 사람은 죽었지요. 공신 이무(李茂·1355~ 1409년)가 죽은 것은 그가 부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功臣은 私, 社稷之臣은 公”


― 역대 정권에서도 늘 그랬지만 대선이 끝나면 저마다 자기 공을 내세울 것이고,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한다고 시끄럽겠네요.


“흔히 논공행상이라는 말을 잘못 쓰고 있는데, 이는 ‘공(功)을 논해서 상(賞)을 주라’는 의미입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상을 주더라도 자리는 주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자리는 현(賢), 즉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5년마다 공신이 만들어지는데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줬다가 난리가 나는 것 아닙니까?”


― 자리를 얻으려고 캠프에도 참여하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자리를 주더라도 국민의 삶과 관계없는 한직(閑職) 같은 걸 줘야지, 국민의 삶과 관계되는 장관이나 국회의원 같은 자리를 주면 안 됩니다. 이런 면에서 문재인(文在寅) 정부는 공(公)이 없었던 거지요. 새 정부도 공신한테 자리를 주는 정치를 하면 어느 쪽이 되든 나는 그런 정부에는 반대입니다.”


― 왕자의 난으로 집권했던 태종은 공신들을 어떻게 통제했습니까.


“여기서도 태종의 지공이 드러납니다. 태종은 공신과, 즉 나라를 맡길 사직지신(社稷之臣)을 엄격히 구분했습니다. 공신은 사(私)예요. 사직지신은 공입니다. 공신들을 우대하다가 ‘공신의 나라’가 되는 것은 고려말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태종에게는 공신들보다 백성이 더 중요했습니다. 태종의 이런 생각을 모르고 지분을 요구하다가 제일 먼저 희생된 사람이 이거이(李居易)였죠.”


― 태종이 공신들에게 단호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우선 태종은 자신이 조선 개국에서도 사실상 특등공신이었고, 두 번의 정난(靖難)도 본인이 주도한 것이었기 때문에 공신들을 통제할 힘이 있었어요. 그 점에서 갑자기 얹혀서 임금이 됐던 중종(中宗)이나 반정(反正)에 약간의 지분(持分)만 있었던 인조(仁祖)와는 달랐지요. 그리고 지인지감이 있었고요.”


― ‘윤석열 당선인 주변에 인(人)의 장막이 쳐졌다’ ‘주변에 예스맨들만 있다’ ‘윤 당선인이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돌고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는데, 그럼 망하는 거죠. 신시(愼始), 시작을 잘해야 합니다. 첫 인사에서 승패가 갈릴 텐데, 정말 능력 위주로 사람들을 잘 써야 합니다.” 



이어지는 인터뷰 전문은  월간조선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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